무라토리 단편이 보여준 ‘정경의 과도기’: 성경 목록은 이렇게 시작됐다

낡은 상자 속에서 발견한 어느 수집가의 목록

집안 대청소를 하다가 아주 오래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안에는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모으셨던 수많은 레코드판과 함께,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습니다. 그 종이에는 할아버지가 정성껏 휘갈겨 쓴 ‘나의 애청곡 목록’이 적혀 있습니다.

이 목록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게 됩니다. 어떤 곡은 제목 옆에 커다란 별표가 그려져 있고, 어떤 곡은 제목만 적힌 채 지워져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종이 한 장을 통해 할아버지가 당시 어떤 음악을 진리로 여겼는지, 그리고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려 했는지 그 ‘취향의 설계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도 이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유물이 있습니다. 바로 18세기 이탈리아의 학자 무라토리가 발견한, 8세기의 낡은 사본 속에 숨겨져 있던 2세기경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라토리 단편’이라 부릅니다. 이는 완성된 성경의 모습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가 수많은 문서 사이에서 무엇을 ‘우리 것’으로 묶으려 했는지 그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담긴 인류 최초의 성경 목록표입니다.

무라토리 단편은 성경 정경 지도가 그려지던 초기 흔적입니다.

무라토리 단편이 보여주는 정경의 과도기

1. 우연이 선물한 역사의 열쇠: 무라토리 단편의 발견

1740년, 암브로시오 도서관의 사서였던 무라토리는 7~8세기에 필사된 어느 투박한 라틴어 사본을 읽던 중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합니다. 그 안에는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아는 성경과는 조금 다른 ‘목록’이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원본이 서기 170년에서 200년 사이, 즉 로마 교회가 한창 기틀을 잡아가던 시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것은 성경이라는 거대한 건물이 완공되기 전, 공사 현장에 남겨진 ‘설계 중간 보고서’와 같습니다.

2. 2세기의 서가에는 무엇이 꽂혀 있었나

무라토리 단편을 들여다보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신약성경의 뼈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개의 복음서(비록 앞부분이 유실되었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추정되는 맥락)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서신 13통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지금은 정경이 아닌 ‘베드로 묵시록’이나 ‘지혜서’ 같은 책들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시의 정경 감각이 지금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지 않았으며, 공동체마다 조금씩 다른 ‘그레이 존(Gray Zone)’이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3. ‘최신작’은 정경이 될 수 없다: 헤르마스의 목자와 고대성의 원칙

이 목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헤르마스의 목자』라는 책을 다루는 태도입니다. 이 책은 당시 매우 인기 있었고 경건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무라토리 단편의 저자는 이 책을 정경 목록에서 단호히 제외합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그 책은 바로 얼마 전인 우리 시대에 로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경의 핵심 기준 중 하나인 ‘고대성(Antiquity)’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사도들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기록은 공동체의 표준이 될 수 없다는 지엄한 논리였습니다.

4. 펜을 들어 경계선을 긋다: 마르시온에 대한 응답

왜 이 시기에 이런 목록이 필요했을까요? 그것은 지난 편에서 다루었던 마르시온처럼 자기 입맛대로 성경을 난도질하는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무라토리 단편의 저자는 마르시온이 위조한 편지들을 언급하며 "담즙을 꿀과 섞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즉, 이 목록은 단순히 책의 제목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단적인 사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친 ‘지적 방어선’이자, 공동체가 공유하는 진리의 최소공배수를 확인하는 작업이었습니다.

5. 완성으로 가는 징검다리로서의 가치

무라토리 단편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성경이 하늘에서 한꺼번에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문서들이 예배에서 검증되고, 학술적으로 고증되며, 공동체의 합의를 거쳐 서서히 하나의 목록으로 굳어지는 ‘살아있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이 낡은 종이 한 장 덕분에 우리는 인류가 어떻게 지혜를 선별하고 보존해 왔는지 그 위대한 여정의 한복판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목록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무라토리 단편이 보여주는 정경의 과도기적 감각은 오늘날 우리에게 결과보다 과정이 주는 아름다움을 일깨워줍니다.

1. 중간 단계의 불완전함을 긍정하십시오

우리는 흔히 완벽한 결론이나 정답을 얻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무라토리 단편은 최종적인 27권의 목록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당시 공동체를 지탱하는 훌륭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또한 지금 당장 완벽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세우고 있는 임시적인 기준과 시도들이야말로 여러분만의 ‘정경’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중간 보고서가 될 것입니다.

2. 경계선은 배제가 아닌 정체성을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무라토리 단편이 담즙과 꿀을 섞지 않겠다고 선언했듯, 여러분의 삶에서도 ‘섞이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수용할 것인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나를 정의하는 가치관의 울타리가 선명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외부의 자극이나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나다운 삶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경계선은 타인을 밀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3. 시간의 여과기를 신뢰하십시오

『헤르마스의 목자』가 좋은 내용임에도 ‘너무 최근의 것’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시간의 검증을 견뎌낸 것들입니다. 

오늘 당장 유행하는 지식이나 찰나의 기분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걸기보다, 오랜 시간 인류가 지켜온 고전의 지혜나 여러분 삶에서 반복적으로 검증된 원칙들에 우선순위를 두어 보십시오.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분의 인생 서가에는 오직 변치 않는 진리만이 아름답게 남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 Bruce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무라토리 단편의 전문 번역과 더불어, 각 문헌이 정경 목록에 포함되거나 제외된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다룬 가장 권위 있는 저술입니다.

  • Harry Y. Gamble, The New Testament Canon: Its Making and Meaning (Fortress Press, 1985).
    정경화 과정을 ‘목록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며, 무라토리 단편이 초기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설명합니다.

  • Ludovico Antonio Muratori, Antiquitates Italicae Medii Aevi (1740).
    무라토리 단편이 최초로 세상에 알려진 역사적 문헌으로, 8세기 사본에 담긴 2세기 로마 교회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 F. F. Bruce, The Canon of Scripture (InterVarsity Press, 1988).
    무라토리 단편에 등장하는 ‘헤르마스의 목자’ 제외 사례를 통해, 초기 교회가 ‘사도성’과 ‘고대성’이라는 잣대를 어떻게 적용했는지 논리적으로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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