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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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말이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할 때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이 말은 신앙을 진지하게 대하자는 권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남깁니다. 이 주장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도 익숙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디모데후서 3:16), 또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태복음 5:18)와 같은 말씀들입니다. 이 구절들은 분명 성경의 권위와 중요성을 강하게 말합니다. 문제는 이 말들이 언제부터인가 ‘모든 문장을 시간과 상황을 넘어 지금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순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맥락을 따지는 것은 말씀을 깎아내리는 일이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신앙에 가깝다는 식의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성경 앞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읽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것인지,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인지조차 헷갈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런 긴장은 사실 성경 읽기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왔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경 해석이 교회의 권위와 결합되면서, 질문이 곧 불순종으로 간주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문장은 때로 왕권이나 질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고,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의 언어로 작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성경을 존중하자는 권면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성경을 처음 접하거나, 오랜만에 다시 읽기 시작한 분들일수록 이 말은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문자 그대로’라는 표현이 마치 모든 문장을 지금 여기에서 즉시 적용해야 한다는 뜻처럼 들릴 때, 성경은 위로의 책이 아니라 시험 문제처럼 느껴집니다.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탈락하는 구조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성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원래 누구에게 쓰였나’부터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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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한 말’로만 읽을 때, 성경은 쉽게 무거워집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문장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향한 말’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경고나 명령이 강하게 느껴지는 구절을 만나면, 그 문장이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나에게 내려오는 판정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을 펼칠수록 마음이 가라앉고, “내가 뭘 잘못했나” 같은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성경이 본래 의도한 반응이라기보다, 성경을 읽는 우리의 위치가 너무 가까워졌을 때 생기는 흔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에 더 민감합니다. 누군가의 조언도, 회사의 공지문도, 심지어 가족 단톡방의 한 문장도 ‘나한테 하는 말인가?’라고 느껴지는 순간 갑자기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문장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위해 쓰인 것이라면 어떨까요? 내가 그 맥락을 모른 채 스스로를 대입해 읽는다면, 필요 없는 죄책감이나 불필요한 두려움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의 상황을 위해 쓰인 책이지만, 처음 기록될 때에는 오늘의 한국 독자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시대와 문화 속의 사람들을 향해 쓰인 책이었습니다.

성경이 무섭게 느껴질 때, 두려움 없이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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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성경의 문제’가 아니라 ‘읽히는 방식’의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하루를 조금 차분하게 시작하고 싶어서 성경을 펼쳤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보려 했는데, 몇 절을 읽지 않아 ‘심판’, ‘진노’, ‘경고’ 같은 단어를 마주하며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 말입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위로나 평안을 얻고 싶어 성경을 읽다가 오히려 생각이 많아져 쉽게 잠들지 못한 경험도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내 신앙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매우 흔하며, 개인의 믿음이 약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마음을 어루만지는 구절들도 많지만, 동시에 경고와 심판, 하나님의 질투와 엄격한 율법, 그리고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장면들도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구절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삶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보다, 나를 평가하고 판결하는 문장처럼 느끼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책이 아니라, 점수를 매기는 시험지처럼 다가옵니다.  하지만 성경은 원래, 사람을 몰아붙이기 위해 기록된 책이라기보다, 흔들리는 삶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기 위해 쓰인 기록입니다. 이 출발점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성경을 읽는 공기는 눈에 띄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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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22장의 약속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요한계시록 21:1 ) 요한계시록 21~22장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의 절정 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인류의 이야기는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귀결됩니다. 이는 단순한 시간적 순서의 종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궁극적 회복의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새'라는 표현은 헬라어 '카이노스(kainos)' 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네오스(neos)'와 구별 되며, 단순히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네오스)과 달리, '질적으로 본질이 다른 새로움' 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존 피조세계의 부분적 보완이나 수선이 아니라, 타락 이전 창조 본래의 완전성과 영광을 회복하고, 한층 더 영화롭게 변화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카이노스'의 개념은 구약 예언자들의 비전과도 연결됩니다. 이사야서 65장 17절에서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아니할 것이라” 고 말씀하며, 장차 이루어질 궁극적 회복을 예고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예언의 완성을 선포하는 장으로, 구속사의 클라이맥스를 그려냅니다. 또한 '바다가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는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변화가 아니라, 고대 근동 문화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혼돈과 악의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영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 바다는 미지와 공포, 혼돈의 상징이었기에, 바다의 소멸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질서와 평강을 선언하는 구절입니다.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은 고통과 죄, 죽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과 피조물의 온전한 교제가 회복되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은 단...

세상의 유혹 속 거룩한 기다림: 누가복음 21장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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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34 – 방탕함, 술취함, 일상의 염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누가복음 21:34) 예수님께서 재림을 준비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이 경고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방탕함', '술취함', '일상의 염려'는 단순한 도덕적 경고를 넘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깊은 내적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방탕함 – 쾌락의 중독과 자기중심성 방탕함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순간의 쾌락과 만족에 집착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방탕함이 결국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적 책임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과도한 소비, 관계의 도구화, 자아중심적 사고는 결국 자신을 고립시키고, 내면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술취함 – 무감각으로 빠지는 회피의 늪 술취함은 단순한 음주 문제를 넘어, 고통과 현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상징합니다. 이는 현실 회피적 중독(알코올, 게임, SNS 등)으로 나타나며, 점점 더 자극적인 것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감정은 무뎌지고, 타인의 아픔에도 둔감해지며, 영적 민감성은 더욱 흐려집니다. 결국 술취함은 '깨어 있음'을 빼앗아가는 가장 교묘한 함정이 됩니다. 일상의 염려 – 생존의 핑계로 가려진 영적 무감각 일상의 염려는 눈앞의 생계, 성공, 미래 불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염려가 단순한 걱정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를 스스로 구원하려는 허망한 노력으로 몰아가며, 영적 여유를 빼앗고 결국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이 세 가지는 겉으로 보기엔 일상적이고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개인의 내면과 공동체, 더 나아가 영혼의 방향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

히브리서가 말하는 재림 신앙: 소망의 엔진으로서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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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브리서 11:1)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성경 구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실상'(hupostasis)은 '확고한 토대', '본질'이라는 뜻을 지니며, '증거'(elegchos)는 '확신', '논리적 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다소 추상적이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이미 손에 쥔 것처럼 확신하며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마치 농부가 씨앗을 심으며 가을의 수확을 확신하는 것처럼, 혹은 계약서를 쥔 사람이 아직 입금되지 않은 돈도 이미 내 것인 양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눈앞에 증거는 없지만,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시기에 그 약속의 실현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믿고, 그날을 향해 나아가는 삶 자체가 곧 '믿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자리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작은 선행을 쌓아가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영원한 나라를 미리 살아가는 것—그것이 바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의 실상'입니다. 고난 중에도 소망을 품는 태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기다림은 단순히 '가만히 견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눈앞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굳게 붙들고, 적극적으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능동적 결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선진들이 보이지 않는 약속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노아는 홍수가 나기 훨씬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했지만, 노아는 오랜 세월 동...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로 배우는 초대교회의 재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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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와 서머나 교회: 재림을 기다린 공동체 초대교회의 재림 신앙은 단순한 종말론적 사상이 아니라,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내는 구체적인 삶의 태도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가 언급되지만, 그중에서도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는 재림의 소망을 실천적으로 살아낸 대표적인 공동체로 주목할 만합니다. 에베소 교회 는 초기 교회의 모범적인 교리적 확립과 열정적인 사역을 통해 '진리를 지키는 공동체' 로 자리 잡았고, 서머나 교회 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순교적 신앙의 전형' 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에서 중요한 대조적 의미를 지니며, 초대교회 전체가 어떻게 재림 신앙을 현실 속에서 살아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일곱 교회 중에서도 이 두 교회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재림 신앙이 공허한 이상이나 두려움의 서사가 아닌,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되고 견뎌낸 신실한 고백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에베소 교회: 첫사랑을 회복하라 에베소는 로마 제국의 아시아 주에서 가장 번영했던 상업 도시 중 하나로, 인구 약 25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였습니다. 도시 한복판에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아르테미스 신전(다이아나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순례객과 상인들을 끌어들이는 종교적·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행 19:1-10). 바울의 사역으로 인해 아르테미스 신상 제작업자들의 수입이 급감하자,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 장인이 선동한 소요사건(에베소 소동)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사도 요한 역시 에베소에서 사역하며 교회를 돌보았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리적 분별력과 거짓 사도를 배격하는 데 탁월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 는 책망을 받습니다. 이는 재림을 소망하는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