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시온의 ‘삭제’와 박해의 ‘불’: 정경을 굳힌 결정적 순간 5가지

울타리는 태풍이 올 때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평소에 집 주위의 울타리는 마당의 풍경을 가리는 답답한 장애물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센 태풍이 몰아치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입자가 나타나는 순간, 그 울타리는 나와 내 가족을 지켜주는 유일한 생명선이 됩니다. 경계선은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본질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정경화 과정 역시 이와 같았습니다. 초기 공동체가 예배와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도들의 글을 읽어오긴 했지만, "이것이 우리 성경의 전부다"라고 못을 박는 일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공동체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몇 차례의 결정적인 폭풍우가 찾아왔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슴 속에 품었던 양피지 뭉치들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 것인가?"

정경화는 우아한 신학적 토론의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벼랑 끝에 선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지적 방어선’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방어선을 치게 만들었던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위기와 박해가 정경의 경계선을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경계를 선명하게 만든 다섯 가지 결정적 동기

1. 삭제의 공격: 마르시온의 ‘가위질’이 만든 역설적인 가속도

정경화의 가장 강력한 방아쇠는 역설적이게도 ‘파괴적인 편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원후 140년경, 로마에서 활동한 마르시온(Marcion)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를 별개의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는 구약 전체를 폐기하고, 신약에서도 유대교적 색채가 있는 부분들을 무참히 도려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누가복음 일부와 바울의 편지 10권뿐인 ‘자기 입맛의 목록’이었습니다. 이는 공동체에 거대한 경종을 울렸습니다. 누군가 ‘삭제’를 통해 진리를 훼손할 때, 교회는 비로소 “무엇이 우리의 전체 목록인가?”를 문서로 확정해야만 했습니다. 마르시온의 가위질은 흐릿했던 정경의 지도를 선명하게 그리게 만든 역설적인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2. 추가의 혼란: 몬타누스의 ‘새 예언’과 계시의 종결 선언

마르시온이 ‘빼기’로 공격했다면, 2세기 후반 프리기아에서 등장한 몬타누스(Montanus)는 ‘더하기’로 혼란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기존의 사도적 가르침을 넘어서는 ‘새로운 계시’를 쏟아냈습니다.

만약 누구나 실시간으로 새로운 성경을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공동체의 정체성은 파편화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이에 대응하여 교회는 ‘고대성(Antiquity)’‘사도성(Apostolicity)’이라는 잣대를 더욱 엄격히 세웠습니다. “사도 시대와 함께 공적인 계시는 종결되었다”는 선언은, 정경이라는 울타리를 더 이상 아무나 넘나들 수 없도록 굳게 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지역적 다양성: 세계적 종교로 나아가기 위한 ‘신앙의 통행증’

초기 기독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각 지역 교회마다 선호하고 읽는 글들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로마에서는 ‘헤르마스의 목자’가 인기였고, 어떤 곳에서는 ‘바나바 서신’에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문제는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기독교가 지역적인 소종교를 넘어 전 세계적인 보편 종교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어느 도시를 가든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Catholicity)’을 갖춘 공통의 표준이 필요했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되 하나의 뿌리를 확인하려는 현실적 동기가 흩어진 문서들을 하나의 ‘정경’으로 묶어주는 강력한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4. 실존적 시험: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와 ‘생명과 바꾼 책’

가장 처절한 필터링은 기원후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 때 일어났습니다. 황제는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너희가 가진 거룩한 책들을 내놓아 불태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성경을 넘겨준 자(Traditores)’들과 끝까지 지킨 자들 사이의 갈등은 실존적 질문을 던졌습니다. 

단순히 경건한 서적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내가 불속에 던져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만큼 가치 있는 책인가?”라는 절박한 질문은, 성경의 목록에서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가장 순수한 본질만을 남기는 가장 뜨거운 용광로가 되었습니다.

5. 목회적 방어선: 위경의 범람으로부터 양 떼를 지키는 법

7편에서도 언급되었던 도마복음이나 마리아복음 같은 위경(Pseudepigrapha)들은 그럴듯한 사도의 이름을 빌려 비밀스럽고 자극적인 지식을 전파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복음서의 형태를 빌려 유포했습니다. 지적 훈련이 되지 않은 평범한 성도들에게 이런 ‘가짜 뉴스’들은 매혹적인 독극물과 같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검증된 진리(Canon)이고, 저것은 개인적 참고용 혹은 위험한 글(Apocrypha)”이라는 구분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적 안전지대를 설정한 것입니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이 목회적 책임감이, 정경이라는 견고한 ‘진리의 성벽’을 완성하는 마지막 벽돌이 되었습니다.


내 삶의 ‘정경’을 사수하는 법

역사 속의 정경이 위기 속에서 선명해졌듯, 우리의 가치관 또한 혼란 속에서 비로소 그 경계가 뚜렷해집니다.

1. 위기를 ‘필터링’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삶에 큰 시련이나 반대 의견이 닥칠 때, 그것을 단순히 고통으로만 여기지 마십시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진짜 성경을 가려냈듯, 위기는 내가 정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내 인생에서 버려도 되는 ‘위경’과 같은 일들은 무엇인지 가려주는 가장 정직한 시간입니다.

2. ‘자기중심적 가위질’을 경계하십시오 (Anti-Marcion)

우리는 때로 내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조언들을 무시(삭제)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마르시온의 실패를 기억하십시오. 진리는 내 입맛에 맞는 조각들의 모음이 아니라, 나를 교정하고 때로는 아프게 찌르는 전체의 목소리입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진실까지 포용할 때, 여러분의 인격은 비로소 ‘정경’처럼 온전해집니다.

3. ‘완결된 기준’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누리십시오

몬타누스의 예언처럼 매번 흔들리는 새로운 소문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오랜 시간 검증된 여러분만의 ‘인생 원칙’을 확립하십시오. 기준이 명확한 사람은 외부의 어떤 바람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울타리가 튼튼한 집 안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듯, 확고한 가치관의 정경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 Bruce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 마르시온, 몬타누스 등 이단 논쟁과 로마의 박해가 정경 형성에 미친 역사적 영향을 치밀하게 고증한 자료입니다.

  • F. F. Bruce, The Canon of Scripture (InterVarsity Press, 1988).

    • 교회가 정경의 범위를 확정해야만 했던 실존적이고 신학적인 동기들을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 Harry Y. Gamble, Books and Readers in the Early Church (Yale University Press, 1995).

    •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당시 기독교 서적들이 처했던 상황과 '성경'의 사회적 인식 변화를 다룹니다.

  • Jason BeDuhn, The First New Testament: Marcion's Scriptural Canon (Religion, 2013).

    • 마르시온이 제시한 최초의 목록이 어떻게 정통 교회의 대응을 이끌어냈는지 집중적으로 조명한 연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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