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의 ‘장면’과 헬라어의 ‘논리’: 성경을 지은 두 언어의 설계도

진리를 담는 ‘그릇’에 관한 이야기

1. 왜 우리는 고대 언어에 주목하는가

우리가 지금 펼쳐보고 있는 성경은 한글이나 영어로 된 매끄러운 번역본입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지혜의 도서관이 처음 지어질 때 사용된 설계도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의 바탕이 된 ‘히브리어’와 신약성경의 통로가 된 ‘헬라어(그리스어)’입니다.

어떤 언어로 기록되었느냐는 단순히 문자의 차이를 넘어, 그 안에 담긴 사상의 '결'을 결정합니다. 마치 같은 풍경을 그리더라도 수채화로 그리느냐, 유채화로 그리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글은 성경이라는 인류의 유산이 왜 하필 이 두 가지 독특한 언어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우리의 삶과 사유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추적하는 여정입니다.

2. 사진으로 말하는 사람과 설계도로 말하는 사람

우리는 같은 대상을 보고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바다가 금빛으로 일렁이며, 내 마음이 뜨거워졌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풍경의 ‘생동감’과 ‘행동’을 한 편의 그림처럼 전달하려 합니다. 반면, 누군가는 “현재 태양의 고도는 몇 도이며, 빛의 산란 현상 때문에 붉게 보이고, 구름의 밀도는 이러해”라고 분석합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소유했습니다. 거칠고 역동적인 ‘히브리어’로 삶의 생생한 현장을 그려냈고, 정교하고 논리적인 ‘헬라어’로 그 의미를 보편적 진리로 풀어냈습니다. 이 두 언어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진리를 온전히 전하기 위한 필연적인 협력이었습니다.

히브리어의 생동감과 헬라어의 논리가 성경을 보편으로 확장했습니다.

언어의 기원과 진리의 무늬

1. 히브리어의 뿌리: 거친 땅에서 피어난 ‘동사적’ 세계관

흔히 ‘이스라엘어’라고 생각하는 히브리어는 기원전 2000년경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서북 세무어군에서 유래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성경의 ‘고대 히브리어(Biblical Hebrew)’가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현대 히브리어와는 결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히브리어는 19세기에 부활한 언어인 반면, 성경의 히브리어는 훨씬 더 감각적이고 신체 중심적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추상적인 명사가 거의 없습니다. 모든 단어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3개의 자음(어근)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다’라는 표현은 “코가 뜨거워지다”라고 씁니다. 분노를 관념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몸이 겪는 실제적인 변화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독자로 하여금 진리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진리는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뜨겁게 숨 쉬고 행동하는 삶의 현장 속에 있음을 히브리어라는 그릇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2. 아람어의 개입: 포로기 이후의 언어적 변천

시리즈 4편에서 다룬 ‘바빌론 포로기’를 거치며 히브리어는 중대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시 제국의 공용어였던 ‘아람어(Aramaic)’를 일상어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의 일부(에스라, 다니엘 등)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훗날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일상어 역시 아람어였습니다.

히브리어가 ‘종교적·학술적 언어’로 보존되었다면, 아람어는 ‘삶의 언어’로 침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히브리어는 더욱 정제되었고, 훗날 헬라어라는 세계 공용어로 건너가기 위한 언어적 융통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한 가지 어조가 아닌, 시대에 따라 변하는 언어의 층위를 갖게 된 것은 그만큼 성경이 실제 역사와 긴밀하게 호흡했음을 보여줍니다.

3. 헬레니즘의 파도: 왜 신약은 헬라어로 쓰였는가?

히브리어를 고수하던 이들이 왜 갑자기 헬라어로 신약을 기록했을까요? 여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자리합니다.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 고대 근동 세계는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거대한 문화적 용광로에 빠졌습니다. 헬라어(코이네 그리스어)는 당시의 ‘영어’와 같은 지위를 얻어 상업, 문화, 정치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히브리어 성경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혹은 흩어진 유대인(디아스포라) 교육을 위해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70인역, LXX). 이 과정에서 히브리어의 ‘이미지’가 헬라어의 ‘논리’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억지가 아니라, “이 진리는 특정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라는 선언적 선택이었습니다.


4. 헬라어: 보편을 향한 정교한 ‘개념적’ 설계도

신약의 언어인 헬라어는 정교한 논리와 추상의 끝을 보여줍니다. 헬라어는 ‘왜(Why)’와 ‘그러므로(Therefore)’를 집요하게 묻는 언어입니다. 단어 하나에도 수많은 격변화와 시제가 존재하여, 말하는 이의 의도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가 사건의 ‘장면’을 보여준다면, 헬라어는 그 사건이 가진 ‘보편적 의미’를 해설합니다. 바울의 서신들이 복잡한 논증을 통해 복음의 철학적 토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헬라어라는 정밀한 도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히브리어라는 깊은 ‘뿌리’에서 길어 올린 지혜가 헬라어라는 정교한 ‘가지’를 통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5. 보만(Thorleif Boman)의 결론: 동적인 존재와 정적인 본질

신학자 토를레이프 보만은 히브리인들이 존재를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파악한 반면, 헬라 인들은 존재를 ‘변하지 않는 본질’로 파악했다고 분석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묻는다면, 헬라어 성경은 “그분은 본질적으로 누구이신가?”를 답합니다. 이 두 질문이 합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입체적인 진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성경이 두 언어의 긴장과 조화 속에 탄생했다는 사실은, 이 책이 처음부터 특정 집단이 아닌 ‘인류 모두를 위한 도서관’으로 설계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내 삶의 언어를 균형 있게 가꾸는 법

히브리어의 생동감과 헬라어의 정교함은 오늘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1. 추상적인 결심을 ‘동사적 행동’으로 바꾸십시오 (The Hebrew Way)

“사랑해야지”, “성실해야지” 같은 추상적인 명사에 머물지 마십시오. 히브리어처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오늘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는 것’이고, 성실은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표를 행동이 보이는 동사로 기록할 때, 삶은 비로소 구체적인 변화를 시작합니다.

2. 경험 뒤에 숨은 ‘의미의 구조’를 분석하십시오 (The Greek Way)

살면서 겪는 수많은 사건을 그저 ‘현상’으로만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헬라어의 정밀함으로 여러분의 삶을 복기해 보십시오. “이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이 경험은 내 미래에 어떤 논리적 발판이 되는가?”라고 질문하십시오. 감정적인 경험에 논리적인 해석이 더해질 때, 여러분의 삶은 단단한 체계를 갖춘 ‘지혜의 서사’가 됩니다.

3. ‘나만의 언어’와 ‘세상의 언어’ 사이의 가교를 놓으십시오

히브리어라는 단단한 뿌리(내면의 정체성)와 헬라어라는 넓은 날개(소통의 보편성)를 동시에 가지십시오. 나만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되, 그것을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하려 노력하십시오. 이 언어적 균형이 잡힐 때, 여러분의 영향력은 담장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 Thorleif Boman, Hebrew Thought Compared with Greek (W. W. Norton & Company, 1960).

    •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의 언어학적 차이를 분석한 고전으로, 본문의 '동적 존재'와 '정적 본질' 개념의 주된 근거입니다.

  • William M. Schniedewind, How the Bible Became a 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다시 헬라어로 이어지는 언어적 전이와 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언어학적 고증을 제공합니다.

  • James Barr, The Semantics of Biblical Language (Oxford University Press, 1961).

    •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구조적 차이가 실제 성경 해석에 미친 영향을 정밀하게 분석한 비판적 연구서입니다.

  • David M. Carr, Writing on the Tablet of the Heart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 헬레니즘 교육 시스템이 성경의 보편화 과정에 미친 논리적 영향력을 분석한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 Angel Sáenz-Badillos, A History of the Hebrew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 고대 히브리어의 기원부터 변천사까지 상세히 다룬 히브리어 역사 언어학의 표준적 저술입니다.

 

함께 보면 좋은 인기 글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누구인가? 사도 요한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