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상징과 이미지가 불안하게 느껴질 때, 공포 대신 맥락으로 읽기
평온을 찾으려 펼친 성경에서, 갑자기 불안이 시작될 때
어느 날 밤, 마음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어 성경을 펼칩니다. 오늘은 ‘위로가 되는 구절’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으로요. 그런데 몇 장 넘기지 않아 낯선 장면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뿔 달린 짐승, 붉은 용, 나팔 소리, 떨리는 땅, 불과 연기 같은 이미지들입니다. 읽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슴이 조여 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지?”라는 질문이 먼저 들고, 곧 “혹시 나에게 경고하는 건가?”라는 불안이 따라옵니다.
특히 요즘처럼 뉴스와 소셜미디어가 하루 종일 사건을 쏟아내는 시대에는, 강한 이미지가 더 쉽게 현실과 연결됩니다. 전쟁, 재난, 질병, 경제 불안 같은 단어들이 이미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상징과 이미지는 ‘옛날 이야기’로 남기보다, 곧바로 현재의 공포를 자극하는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상징과 이미지로 쓰인 성경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미 불안한 상태로 그 언어를 읽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상징은 ‘공포를 키우는 장치’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게 하는 언어’였습니다
성경의 상징과 이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이 언제 등장했는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상징은 대체로 평온한 시대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설명할 말이 충분한 시대라면 굳이 상징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징은 대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위기와 압박 속에서 등장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나라가 기울어가고, 전쟁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결국 포로와 붕괴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강한 이미지와 비유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무서운 표현’이라기보다, 무너지는 현실을 신앙의 언어로 붙들기 위한 절박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현대 구약학에서도 널리 공유되는 관점입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선지자들의 언어를 ‘위기의 현실 속에서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상징적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선지자적 상상력은 공포를 증폭시키기보다 공동체가 절망 속에서도 의미를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과 상징 역시 이런 맥락 안에서 이해됩니다. 에스겔서는 바벨론 포로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고, 성전과 땅을 잃은 공동체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라고 묻던 자리에서 등장한 언어였습니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는 에스겔의 상징적 환상들이 심판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한 장면이 아니라, 무너진 정체성을 다시 재구성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신학적 장치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볼 때, 선지자들의 상징은 공포를 주입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붕괴의 시대 속에서도 공동체가 의미를 포기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마지막 형태의 언어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묵시문학인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권력 아래에서 작은 공동체는 자신의 믿음이 무력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1세기 말은, 로마 황제 숭배가 일상적 충성의 기준으로 작동하던 시기였고,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종교적 압박 속에서 끊임없이 정체성의 위협을 경험했습니다.
신약학자 아델라 야브로 콜린스(Adela Yarbro Collins)는 요한계시록을 ‘억압받는 공동체가 제국의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하도록 돕는 저항의 문학’으로 설명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짐승, 용, 숫자, 나팔 같은 상징들은 미래의 공포를 예언하기 위한 암호라기보다, 로마 제국의 권력과 폭력을 드러내고 상대화하기 위한 상징적 언어입니다.
또한 신약학자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은 요한계시록이 제국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현실을 다시 보도록 훈련시키는 상징적 서사’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구들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은 독자들을 겁주기 위해 과장된 이미지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이 전부’라고 주장하던 제국의 서사를 해체하고, 다른 질서와 다른 충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문학적 전략이었습니다.
즉, 묵시문학의 상징은 공포를 확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였습니다.
우리가 상징을 읽을 때 불안해지는 진짜 이유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상징을 읽을 때 오히려 불안해질까요. 여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상징은 해석의 ‘문’이 열려 있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설명문은 결론이 비교적 분명하지만, 상징은 한 번에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징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불확실성을 느낍니다. 확실한 답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상징 앞에서 더 불안해집니다.
둘째, 상징은 종종 ‘예측의 도구’로 오용되어 왔습니다.
누군가가 상징을 들고 나와 “이게 바로 지금 시대의 징조다”라고 단정하는 순간, 상징은 위로가 아니라 공포의 신호로 변합니다. 특히 종말론적 상징은, 불안한 사람에게는 강력한 매력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이게 다 계획된 일이다”라는 설명을 제공해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계획이 ‘공포의 계획’으로 들리는 순간, 사람은 성경을 읽고 위로를 얻기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셋째, 상징을 ‘나에게 대한 판결’로 받아들이는 습관이 불안을 키웁니다.
상징은 원래 공동체를 향해, 시대를 향해, 구조를 향해 던져지는 언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곧바로 개인의 죄책감이나 불안과 연결해 버리면, 상징은 나를 몰아붙이는 이미지로 변합니다. 그 순간 “나는 안전한가?” “나는 심판받을 사람인가?” 같은 질문이 성경의 중심 질문이 되어 버립니다.
상징을 안전하게 읽는 첫 번째 원칙은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상징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그 상징의 대상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그 짐승을 ‘나에게 다가오는 개인적 재앙’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상징은 개인의 일기장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공동체와 시대를 흔드는 권력과 폭력, 우상숭배 같은 구조를 겨냥합니다.
상징을 ‘나에게’로만 끌어오면 불안이 커집니다. 하지만 상징의 시선을 ‘나’에서 ‘현실’로 옮기면, 상징은 오히려 현실을 해석하는 눈을 줍니다.
짐승의 이미지를 읽으며 “이건 누구냐”를 찾는 대신, “이 본문이 말하는 ‘짐승 같은 힘’은 어떤 성격을 가진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폭력, 거짓, 착취, 공포를 통해 사람을 통제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그때 상징은 ‘예측의 퍼즐’이 아니라 ‘분별의 렌즈’가 됩니다.
상징을 안전하게 읽는 두 번째 원칙은 ‘장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상징은 상징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약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선택한 문학적 방식에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묵시문학은 바로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상징과 이미지, 과장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장르를 무시하면 우리는 상징을 ‘사실 확인’의 영역으로 끌어오게 되고, 결국 불안은 커집니다.
반대로 장르를 인정하면, 상징은 ‘현실 너머의 진실’을 가리키는 언어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바다”가 혼돈과 위협을 상징하는 방식, “빛”이 하나님의 통치와 소망을 가리키는 방식은 문자적 사실보다 더 깊은 현실을 말합니다. 이때 상징은 공포가 아니라 의미가 됩니다.
상징을 안전하게 읽는 세 번째 원칙은 ‘속도를 늦추되, 정보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상징을 읽을 때 속도를 늦추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막연한 인내나 지루한 버팀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정보를 확보하며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도움이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먼저, 상징이 등장하는 본문이 어떤 역사적 시기와 연결되는지 빠르게 확인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는 로마 제국이라는 배경을, 다니엘서를 읽을 때는 제국의 압박 속에서 정체성을 지키려는 공동체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상징은 개인에게 던져진 공포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언어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는, 한 가지 설명에만 의존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즘은 인공지능 도구를 활용해 “이 상징이 당시 독자에게는 어떤 의미였는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다만 답을 그대로 믿기보다, 같은 질문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시 묻고, 서로 다른 요약을 비교해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한 성경 안에서 같은 상징이 다른 책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찾아보는 것도 좋은 크로스체크가 됩니다. 예를 들어 ‘바다’가 여러 본문에서 어떤 느낌으로 등장하는지, ‘용’이나 ‘짐승’ 같은 이미지가 구약의 어떤 배경을 끌어오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상징은 훨씬 덜 위협적으로 느껴집니다.
상징과 이미지는 우리를 겁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을 읽다가 불안해지는 경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불안이 우리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방향으로만 흘러갈 때 문제가 됩니다.
상징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폭력과 혼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상징은 공포를 확대하는 언어가 아니라, 공포를 상대화하는 언어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상징과 이미지가 언제나 건강하게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사이비 종교 집단이나 극단적인 종말론 공동체에서는, 성경의 상징과 이미지를 맥락에서 떼어내어 문자 그대로 적용하거나 특정 시기와 사건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묵시적 이미지를 절대적인 해석으로 고정한 뒤, 그것을 통해 두려움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판단을 대신하려는 시도는 반복되어 왔고, 그 결과 성경은 위로의 언어가 아니라 통제와 선동의 도구로 변질되곤 했습니다.
이런 경우 상징은 ‘분별의 렌즈’가 아니라, 질문을 금지하고 생각을 멈추게 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지금은 묻지 말라”, “이 해석에 순종하라”는 요구가 등장하는 순간, 상징은 더 이상 하나님을 가리키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상징과 이미지를 읽을 때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예측의 퍼즐’로 읽어 불안을 키울 수도 있고, ‘분별의 렌즈’로 읽어 현실을 더 정확히 볼 수도 있습니다.
맥락 속에서 상징을 읽는다는 것은, 독자가 자신의 불안을 방치하는 일이 아니라, 불안을 다루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사이비적 해석이나 극단적 종말론이 개인의 양심과 판단을 대신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성경은 우리를 몰아붙이는 책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는 언어로 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