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낯설게 느껴질 때, ‘원래 누구에게 쓰였나’부터 확인하세요

‘나에게 한 말’로만 읽을 때, 성경은 쉽게 무거워집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문장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향한 말’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경고나 명령이 강하게 느껴지는 구절을 만나면, 그 문장이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나에게 내려오는 판정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을 펼칠수록 마음이 가라앉고, “내가 뭘 잘못했나” 같은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성경이 본래 의도한 반응이라기보다, 성경을 읽는 우리의 위치가 너무 가까워졌을 때 생기는 흔한 현상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에 더 민감합니다. 누군가의 조언도, 회사의 공지문도, 심지어 가족 단톡방의 한 문장도 ‘나한테 하는 말인가?’라고 느껴지는 순간 갑자기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 문장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상황을 위해 쓰인 것이라면 어떨까요? 내가 그 맥락을 모른 채 스스로를 대입해 읽는다면, 필요 없는 죄책감이나 불필요한 두려움이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의 상황을 위해 쓰인 책이지만, 처음 기록될 때에는 오늘의 한국 독자가 아니라, 전혀 다른 시대와 문화 속의 사람들을 향해 쓰인 책이었습니다.

게 판정처럼 느껴질 때, ‘첫 독자’와 맥락을 먼저 확인해 두려움을 줄이는 읽기 방법을 안내합니다.

성경의 첫 독자는 ‘나’가 아니라, 그 시대의 공동체였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은 개인을 위한 묵상 노트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기록이었습니다. 어떤 본문은 포로로 끌려가 삶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어떤 본문은 제국의 권세 아래에서 신앙을 지키려 애쓰던 공동체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오늘처럼 개인의 내면을 중심으로 신앙을 이해하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버틸 것인가’, ‘우리의 하나님은 이 현실 속에서 어떤 분이신가’를 붙들고 살았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성경의 강한 표현들이 왜 등장하는지 조금 더 차분히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지서의 경고는 흔히 개인을 쥐어짜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는 길로 가고 있을 때 방향을 다시 잡게 하려는 언어였습니다. 

또한 시편의 탄식은 “믿음이 약해서 힘든 게 아니다”라는 고백에 가깝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슬프고, 억울하고, 두려울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도록 허락하는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개인의 즉각적 판단’으로 바로 축소되기 전에, 먼저 ‘그때의 공동체’가 어떤 자리에서 이 말을 들었는지를 잠시라도 떠올리는 일입니다. 그 거리감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자책을 줄이고, 본문이 본래 전하려던 의도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원래 누구에게 쓰였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읽기가 안전해집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쓰인 책이 아니었다는 말은, 성경이 우리와 무관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먼저 ‘원래의 자리’를 확인할 때, 성경이 오늘의 삶에 더 깊게 닿을 수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읽을 때와 비슷합니다. 편지의 문장 하나만 떼어 읽으면 오해가 생기지만, 누가 누구에게, 어떤 사정으로 썼는지 알게 되면 같은 문장이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날에는 그 말이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라는 압박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실제로는 전쟁과 포로, 생존의 위협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네가 겁을 느끼면 안 된다”가 아니라 “겁이 있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너를 놓지 않는다”에 더 가깝습니다. 문장의 표면만 보면 명령처럼 보이지만, 자리가 보이면 위로로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무거워질 때, 이렇게 질문해 보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집니다. “이 말은 원래 누구에게 주어진 말이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현실 속에서 이 문장을 들었을까?” 이 질문은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안전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성경을 ‘통제의 문장’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읽는 사람의 자리를 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적용’은 맥락을 건너뛰는 지름길이 아니라, 천천히 건너가는 다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곧바로 적용을 찾으려 합니다. 그 마음 자체는 귀합니다. 다만 적용이 너무 빨라지면, 본문이 가진 역사와 문학을 건너뛰게 되고, 결국 남는 것은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것’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삶을 비추는 책이 아니라, 체크리스트가 됩니다. 어떤 분들은 그 체크리스트를 충실히 따르려다가 지치고, 어떤 분들은 “어차피 못 할 것 같아”라는 마음으로 아예 멀어지기도 합니다.

성경의 적용은 더 느린 방식으로도 가능합니다. 먼저 본문이 어떤 장르인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시는 시로, 지혜문학은 지혜문학으로, 묵시적 이미지는 묵시적 이미지로 읽을 때 ‘문자 그대로’가 의미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모든 문장을 사진처럼 한 치의 여지 없이 받아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 그 문학이 의도한 방식과 흐름을 존중하며 읽으라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교회 안에서는 종종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으니, 모든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읽고 있는 성경은 오랜 시간과 여러 언어를 거쳐 전해진 텍스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은 중국어 성경의 영향을 받아 번역되었고, 중국어 성경은 다시 영어권이나 서구의 번역 전통을 참고해 만들어졌습니다. 

영어 성경 역시 독일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 전통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라틴어 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된 원문을 옮긴 결과입니다. 이 과정에서 표현과 어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성경의 가치를 떨어뜨리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성경을 더 신중하고 성실하게 읽어야 할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읽는다는 것은, 번역된 한 문장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나를 재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문장이 어떤 언어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들을 향해 쓰였는지를 함께 살피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그때 적용은 “오늘 무엇을 당장 해야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이 본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형성하는가”, “나는 어떤 시선으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가”까지 넓어집니다. 

이렇게 읽을 때, 성경은 두려움을 키우는 기준표가 아니라, 삶을 해석하는 더 깊은 눈을 길러주는 책으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잠언이나 전도서의 어떤 문장이 ‘항상 이렇게 된다’는 약속이 아니라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다’는 삶의 통찰일 수 있듯이, 한 구절을 단정적으로 붙잡기보다 그 흐름과 목적을 이해하는 편이 마음을 더 살립니다.

성경이 인생을 단순화해 주는 책이라기보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시야를 넓혀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됩니다.


‘거리’는 신앙을 식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지켜줍니다

성경과 적절한 거리를 둔다는 말은, 하나님을 멀게 두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늘 화가 나 있는 분’, ‘언제든 처벌을 준비하는 감시자’로 오해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너무 가까이에서, 맥락 없이, 즉각적인 자기평가의 도구로만 읽으면 하나님을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내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읽을수록 마음이 평안해지기보다 더 불안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4절에서, 기록된 것들이 “인내와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목적이 결국 위로와 소망을 향해 있다는 이 문장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방향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경을 ‘나를 몰아붙이는 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 세우는 책으로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식 자체를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무거워지는 구절을 만났을 때, 곧바로 나에게 적용하려 애쓰기보다 먼저 멈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어떤 상황 속에서 주어졌을까?”, “이 말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본문과 나 사이에는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오늘의 삶으로 옮겨오는 작업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일 수도 있고, ‘이 장면 속 사람들과 나의 두려움이 닮아 있다’는 깨달음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 행동도 결정하지 않은 채, 그날의 성경 읽기를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가장 정직한 적용일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쓰인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더 책임감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이 태어난 자리와 처음 들었던 사람들을 먼저 존중한 뒤에, 그 의미를 오늘의 삶으로 옮겨오는 일은 독자에게 맡겨진 몫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성경은 조급한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하루의 속도를 조절해 주는 기준점이 됩니다. 이 방식은 빠른 답을 주지는 않지만, 성경 앞에서 불필요한 두려움을 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다 안정적으로 지켜 주는 실제적인 길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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