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은 ‘기획’이 아니라 ‘그리움’에서 태어났습니다: 우연한 정경의 시작
기록은 ‘기획’보다 ‘그리움’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열렬히 사랑에 빠졌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그 사람과 나누는 대화, 함께 걷는 길,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굳이 우리가 나눈 대화를 기록하여 ‘사랑의 교본’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사람이 멀리 떠나거나, 다시 만날 기약이 늦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펜을 듭니다. 그가 남긴 편지를 소중히 모으고, 그가 했던 말들을 기억해 내어 종이 위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신약성경의 탄생도 이와 같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된 ‘책’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전해 들었던 예수라는 인물의 ‘살아있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 굳게 믿었기에, 수백 년 후를 대비한 경전을 만들 여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파편화된 편지들과 기억들이 오늘날 우리가 읽는 ‘거룩한 경전’으로 굳어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기획된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간절한 그리움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실존적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예배와 위기, 그리고 그리움이 빚어낸 ‘우연한 정경’
1. 살아있는 목소리(Viva Vox): 책보다 뜨거웠던 구전의 시대
예수 사후 약 20~30년 동안 초대교회에는 ‘신약성경’이라는 물리적인 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성경은 유대교 경전(구약)뿐이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입에서 제자들의 귀로 전해지는 ‘살아있는 목소리(Viva Vox)’였습니다.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Papias)는 “나는 기록된 책에서 얻는 정보보다, 살아있는 목소리에서 직접 듣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고대인들에게 ‘글’은 죽어있는 기록인 반면, ‘말’은 인격과 영혼이 담긴 생생한 진리였음을 보여줍니다. 초기 복음은 종이 위가 아니라, 함께 빵을 떼며 나누던 뜨거운 대화 속에서 파도치고 있었습니다.
2. 의도하지 않은 불멸: 바울의 편지는 ‘성경’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금 경건하게 읽는 바울의 서신들은 사실 처음부터 경전을 목적으로 기획된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 문제 등 특정 지역 교회의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답하기 위해 보낸 ‘목회적 편지’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수천 년 뒤 인류의 경전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저 멀리 떨어진 교우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긴급한 소통 수단이었죠. 하지만 그 편지들에 담긴 통찰이 너무나 깊고 권위가 있었기에, 수신인들은 이를 한 번 읽고 버리는 대신 보물처럼 소장하며 옆 동네 교회와 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적인 편지가 공적인 기록으로 변모하는 ‘우연한 전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3. 사라져가는 증인들: ‘기다림의 지연’이 낳은 기록의 결단
초기 공동체는 예수가 조만간 다시 오실 것이라(재림) 굳게 믿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곧 닥칠 텐데 수백 년을 내다본 기록을 남길 이유는 없었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재림은 지연되었고, 예수의 생애를 직접 목격했던 사도들과 증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에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목격자들이 모두 사라지면, 누가 예수의 진짜 목소리를 증명할 것인가?”라는 실존적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공동체는 사라져가는 기억을 고정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마가, 마태, 누가와 같은 복음서 저자들은 사도들의 구전 전승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기록물로 정착시켰습니다. 기록은 ‘기획’된 것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저항으로 탄생했습니다.
4. 예배당에서의 공적 낭독: 텍스트에 ‘거룩함’을 입히는 시간
신약의 문서들이 ‘성경’이라는 신성을 획득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장소는 다름 아닌 예배의 현장이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배 중 유대교 성경(구약)을 낭독한 뒤, 사도들의 편지나 복음서를 나란히 읽었습니다. 구약이라는 검증된 경전 옆에 사도들의 글이 놓여 함께 낭독된다는 것은, 공동체가 그 글의 권위를 구약과 동등하게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누가 법으로 정해서가 아니라, 매주 예배 때마다 그 글을 읽으며 위로를 얻고 삶의 기준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문서들은 서서히 ‘거룩한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서의 꾸준한 ‘공적 독서(Public Reading)’가 평범한 문서를 비범한 경전으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5. 공동체의 울타리: 이단의 도전에 응전하며 굳어진 정경 의식
공동체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가짜 뉴스’들이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단들의 자극적인 가르침은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죠. 이때 교회는 “우리가 가르치는 내용의 표준(Standard)이 정확히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은 흩어져 있던 문서들을 하나의 체계로 묶는 강력한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도들이 전해준 ‘믿음의 법칙’에 부합하는 글들을 선별하고 목록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정경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행정적 결정이 아니라, 수백 년간 예배에서 검증되고 논쟁의 현장에서 지켜낸 문서들이 자연스럽게 이룬 ‘거대한 합의’의 결과였습니다.
삶의 ‘권위’가 형성되는 원리
초기 교회가 경전을 형성해 간 과정은 오늘날 우리가 개인의 삶에서 ‘진정한 권위’를 세우는 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1. ‘기획’보다 ‘현장’의 힘을 믿으십시오 (Trust the Process)
거창한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무엇이 반복되고 무엇이 나를 살리는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예배의 반복 속에서 권위를 얻었듯, 여러분의 일상에서 꾸준히 실천되고 열매를 맺는 습관들이 결국 여러분의 삶을 규정하는 ‘진짜 권위’가 됩니다.
2. ‘공감’을 얻지 못하는 권위는 독단입니다
신약의 문서들이 보편성을 통해 정경이 되었듯, 여러분의 생각이나 가치관도 주변 공동체와 소통하며 검증받아야 합니다.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경(가짜)’이 되기 쉽습니다.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때, 여러분의 목소리는 비로소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정경’과 같은 힘을 갖게 됩니다.
3. 위기를 ‘정리’의 기회로 삼으십시오
초기 교회가 사도들의 죽음과 이단의 공격이라는 위기 속에서 성경을 정리했듯, 삶의 혼란이 찾아올 때가 바로 내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목록화’할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치열한 과정을 통해, 여러분의 내면에는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신약(New Covenant)’이 쓰여질 것입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C. F. D. Moule, The Birth of the New Testament (Harper & Row, 1962).
신약성경이 초기 교회의 삶과 예배라는 토양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발생했는지 다루는 고전적 저술입니다.
Harry Y. Gamble, Books and Readers in the Early Church: A History of Early Christian Texts (Yale University Press, 1995).
초기 기독교 문헌들이 어떻게 제작되고, 유통되며, 공적 독서를 통해 권위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사적 분석을 제공합니다.
Bruce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신약의 각 권이 정경화 과정을 거치며 어떻게 선택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팩트를 상세히 고증합니다.
Eusebius of Caesarea, Church History (Historia Ecclesiastica).
4세기 초의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기록한 초기 교회의 문서 수집과 정경 형성 과정에 관한 1차 사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