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글자로 성소를 지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당신을 증명할 마지막 하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가꾸어 온 터전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나고 자란 집,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던 이웃, 그리고 내 존재의 근간이었던 모든 질서가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는 경험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가방 속에는 대개 무거운 금붙이나 화려한 옷가지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가슴에 품고 가는 것은 빛바랜 사진 한 장, 혹은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이야기가 적힌 낡은 수첩입니다.

왜 우리는 그 절박한 순간에 '기록'을 선택할까요? 그것은 땅은 빼앗길 수 있고 건물은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나의 이야기’는 아무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경이 가장 찬란하게 다듬어졌던 시기는 역설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모든 것을 잃고 이방 땅으로 끌려가던 가장 어두운 ‘상실의 시대’였습니다. 그 절망의 끝에서 그들은 가슴 속에 품고 다닐 수 있는 ‘글자로 지은 성소’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실의 시대, 텍스트는 흩어진 공동체의 ‘품 안의 성소’가 되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의 잔해 위에서 세운 ‘문자의 영토’

1. 기원전 586년, 세계가 무너져 내린 날

성경의 역사를 모르는 분들에게 기원전 586년은 그저 먼 과거의 숫자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해는 ‘세계의 종말’과 같았습니다.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바빌론 제국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그들의 자부심이자 신앙의 심장이었던 솔로몬 성전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습니다.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서 성전은 단순한 종교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신이 지상에 머무는 유일한 ‘주소’였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이 패배했거나, 혹은 자신들을 버렸다는 실존적 공포를 의미했습니다. 

영토를 잃고, 왕을 잃고, 급기야 신이 거하는 집까지 잃은 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바빌론 땅으로 끌려가던 포로들에게 남은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성전 없는 우리가 여전히 그분의 백성인가?”

2. 하인리히 하이네의 ‘휴대용 고향’과 ‘품 안의 성소’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이 처절한 생존의 과정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이 지켜낸 성경을 가리켜 ‘포르타티베 파터란트(Portative Vaterland)’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포터블 홈랜드(Portable Homeland)’, 즉 직역하면 ‘휴대용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휴대용’이라는 단어는 현대 한국어에서 가전제품이나 편의 용품에 주로 쓰여,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진리의 무게를 담기엔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폴’은 이 표현을 우리 정서에 맞게 ‘품 안의 성소(聖所)’라고 고쳐 부르기로 했습니다.

물리적인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허물어졌지만, 그들은 성전에 흐르던 정신과 진리를 ‘두루마리’라는 작은 종이 위에 옮겨 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아도, 가슴 속에 품은 그 두루마리를 펼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을 성전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기록의 가속화: 상실감이 낳은 정교한 보존

바빌론의 거대한 운하 곁에 둘러앉은 이스라엘의 노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고향 예루살렘에서 끌려온 지 어느덧 수십 년, 그들의 머리 위로는 이국적인 바빌론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빌론의 채찍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망각’이라는 이름의 소리 없는 재앙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던 세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바빌론의 화려한 도시 문화 속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서서히 조상들의 언어 대신 제국의 언어인 아람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그 하나님은 누구인가요? 왜 우리는 이 먼 땅까지 오게 되었나요?”라고 묻는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서, 노령의 서기관들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증발해버릴 것이라는 공포였습니다.

이때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정교한 ‘구조 작업’이 시작됩니다. 서기관들은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기록들, 성전에서 불려왔던 노래들, 그리고 노인들의 기억 속에만 머물던 구전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슈니더윈드(William M. Schniedewind)와 같은 학자들은 이 시기를 성경 형성의 ‘대폭발’ 시기로 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진 성전 대신 ‘글자로 지은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전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최근의 비극적인 멸망까지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엮어냈습니다.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더 큰 진리를 향해 연단받는 중이다”라는 새로운 해석을 문장마다 심었습니다. 

위기는 기록을 낳았고, 그 기록은 절망에 빠진 포로들에게 다시 일어설 ‘이유’를 선물했습니다.

4. 제국의 문화적 압살에 맞선 ‘문자적 독립운동’ (Concrete Dynamics)

당시 바빌론은 오늘날의 뉴욕이나 런던을 압도하는 고대 세계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그들의 위용을 상징하는 ‘이슈타르 문’은 푸른 보석처럼 빛나는 타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 높이 솟은 지구라트(Ziggurat)는 바빌론의 신 ‘마르두크’의 강력한 힘을 매일같이 과시했습니다. 

제국은 포로들에게 아주 매력적이고도 무서운 제안을 했습니다. “너희의 패배한 신을 버리고, 우리 제국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질서 속에 편입되어라.”

이것은 칼날보다 무서운 ‘문화적 압살’이었습니다. 제국은 자신들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를 통해, 세상은 혼돈과 전쟁 속에서 태어났으며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 보잘것없는 소수 민족이었던 포로들은 그 거대한 담론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군대도 없고 영토도 없었던 그들이 선택한 저항 수단은 놀랍게도 ‘글쓰기’였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신화에 대항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는 장엄한 선언을 기록했습니다. 제국이 ‘전쟁과 폭력’이 질서라고 말할 때, 성경의 저자들은 ‘조화와 안식’이 진정한 질서라고 썼습니다. 제국이 왕을 신의 아들이라 칭송할 때, 그들은 보잘것없는 노예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존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지적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잉크와 양피지로 무장한 이 저항은 제국의 화려한 건축물보다 훨씬 단단했습니다. 

제국의 건물은 세월이 흘러 먼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가슴속에 품고 다녔던 그 ‘품 안의 성소’는 수천 년을 살아남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물리적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제국을, 그들은 ‘글의 힘’으로 넘어서 버린 것입니다.


내 삶의 ‘품 안의 성소’를 구축하는 법

바빌론의 포로들이 텍스트를 통해 성소를 회복했듯, 우리 역시 삶의 위기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줄 나만의 텍스트가 필요합니다.

1. 상실의 순간에 펜을 드십시오 (Writing as Anchor)

인생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했을 때,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여러분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가치관을 글로 적어보십시오. 막연한 공포는 기록되는 순간 ‘객관화된 사실’이 되고, 여러분이 지켜야 할 ‘정신적 영토’가 선명해집니다. 기록은 혼란 속에서 나를 붙들어 매는 가장 단단한 닻입니다.

2. 나만의 ‘핵심 문장’을 선정하십시오 (Personal Canon)

성경의 서기관들이 수많은 이야기 중 민족을 살릴 핵심을 추려냈듯, 여러분의 삶을 정의하는 핵심 문장들을 선정해 보십시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여러분을 흔들어도, 이 문장들을 품 안에 간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디서든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내면의 성소’를 소유하게 됩니다.

3. 기록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재맥락화하십시오

포로기의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의미를 찾아냈듯, 여러분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들을 기록을 통해 긍정적인 서사로 바꾸어 보십시오. 사건은 바꿀 수 없지만, 그 사건을 기록하는 ‘해석의 힘’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가장 빛나는 기록으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마주하는 바빌론 같은 위기도, 어쩌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품 안의 성소’를 짓게 하려는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 William M. Schniedewind, How the Bible Became a Book: The Textualization of Ancient Isra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 바빌론 포로기라는 '문화적 트라우마'가 어떻게 구전 중심의 사회를 급격한 '기록 중심 사회'로 밀어 넣었는지 분석한 사회언어학적 핵심 자료입니다.

  • Peter Enns, Inspiration and Incarnation: Evangelicals and the Problem of the Old Testament (Baker Academic, 2005).

    • 본문에서 다룬 바빌론의 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와 성경의 창조 기사가 어떻게 지적으로 충돌하고 저항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비교 문학 연구서입니다.

  • John H. Walton, Ancient Near Eastern Thought and the Old Testament (Baker Academic, 2006).

    • 바빌론의 지구라트, 이교 신전의 기능 등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상세히 고증하여, 성경의 기록이 당시 문화권 내에서 얼마나 독창적인 '사상적 독립운동'이었는지 뒷받침합니다.

  • Heinrich Heine, Geständnisse (Confessions) (1854).

    • 본문에서 '품 안의 성소'로 재해석한 '포르타티베 파터란트(Portative Vaterland)'라는 개념의 원전입니다. 유대 민족에게 텍스트가 갖는 '정신적 영토'로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정의했습니다.

  • Daniel L. Smith-Christopher, A Biblical Theology of Exile (Fortress Press, 2002).

    • 포로기의 절망적인 상황이 어떻게 성경의 신학을 더 정교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다루는 심도 있는 연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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