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에서 책으로: 코덱스가 ‘성경 한 권’을 가능하게 한 이유

낱장의 편지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 중에서 가장 손때가 묻은 한 권의 책을 꺼내 봅니다. 우리는 그 책을 ‘한 권’으로 인식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문장과 문단, 그리고 작가가 고심 끝에 배치한 여러 장(Chapter)이 숨어 있습니다. 만약 이 책의 페이지들이 모두 낱장으로 뜯겨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저 ‘종이 뭉치’에 불과할 것입니다.

성경 역시 처음부터 지금처럼 가죽으로 멋지게 제본된 ‘한 권의 책’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것은 누군가의 서신이었고, 어떤 것은 예배를 위해 기록된 짧은 기록물이었습니다. 이 흩어져 있던 문서들이 하나의 표지 안에 묶여 ‘성경(The Bible)’이라는 단일한 권위로 인식되기까지는 인류 문명사와 기술사의 극적인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흩어진 조각들이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을 이루는 ‘단일한 목소리’로 통합되었는지, 그 보이지 않는 끈을 찾아 떠나보겠습니다.

코덱스 혁명이 흩어진 문서를 ‘한 권의 성경’으로 묶었습니다.

기술적 혁명과 인식의 전환이 만든 ‘한 권’의 감각

1.  기술의 혁명: 두루마리(Scroll)의 한계를 넘은 코덱스(Codex)의 탄생

낱권의 문서들이 ‘한 권’으로 묶이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역설적으로 ‘제본 기술’의 발달이었습니다. 고대에는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길게 이어 붙여 둘둘 마는 ‘두루마리’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보통 두루마리 한 통의 길이는 약 10m 정도였는데, 이는 복음서 한 권이나 바울의 서신 몇 개를 담기에도 벅찬 크기였습니다. 신구약 전체를 한 통의 두루마리에 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죠.

이때 등장한 것이 오늘날의 책 형태인 ‘코덱스(Codex)’입니다. 낱장을 겹쳐 한쪽 면을 묶는 이 방식은 혁명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새로운 기술의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습니다. 코덱스는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경제적이었고, 무엇보다 ‘찾아보기’가 압도적으로 쉬웠습니다. 

여러 권의 두루마리에 나누어 담아야 했던 텍스트들을 이제 한 권의 표지 안에 모두 집어넣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술적 그릇이 바뀌자, 비로소 ‘성경은 물리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시각적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2. 언어의 전환: ‘거룩한 도서관(Ta Biblia)’에서 ‘단일한 정경(The Bible)’으로 

‘성경’을 뜻하는 영어 단어 ‘Bible’의 어원에는 놀라운 인식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그리스어 ‘타 비블리아(Ta Biblia)’에서 왔는데, 이는 ‘그 책들’이라는 뜻의 복수형이었습니다. 즉,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성경은 ‘여러 권의 거룩한 책들이 모인 도서관’이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경부터 사람들은 이 복수형 단어를 단수형인 라틴어 ‘비블리아(Biblia)’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명의 저자가 각기 다른 시대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흐르는 메시지가 하나의 일관된 진리를 향하고 있다는 ‘내적 통일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이라는 복수적 인식이 ‘한 권의 책’이라는 단수적 인식으로 변모한 것은, 성경이 파편화된 정보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세계관으로 자리 잡았음을 상징하는 언어학적 사건입니다.

3. 공적 낭독과 교육: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관통하는 ‘구원 역사’의 발견 

문서들이 한 권으로 인식된 또 다른 배경은 ‘예배’와 ‘낭독’을 통해 형성된 서사의 힘이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배 때 구약과 신약의 본문들을 교대로 낭독했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가 시편의 노래를 거쳐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매주 귀로 듣는 동안, 성도들의 머릿속에는 파편화된 정보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구원 역사(Heilsgeschichte)’의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육과 낭독을 통해 흩어진 본문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고, 독자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하나의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된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학술적으로 이를 ‘정경적 읽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낱권으로 존재할 때는 보이지 않던 유기적 연결고리들이, 한 권으로 묶여 읽힐 때 비로소 ‘약속과 성취’라는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로 완성된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제 각 권을 따로 떼어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서사 안에서 각 권의 의미를 찾는 ‘통합적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4. 경계의 확정: 목록을 닫고 표지를 덮는 ‘정경화의 종결’ 

이단과의 논쟁은 성경을 ‘닫힌 체계’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을 마음대로 삭제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가짜 복음서를 덧붙이려는 시도들에 맞서 교회는 성경의 목록(Canon)을 엄격히 제한해야 했습니다. 무라토리 단편이나 아타나시우스의 편지 등을 통해 성경의 목록이 27권(신약)으로 굳어지면서, 성경은 더 이상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뺄 수 없는 ‘완결된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목록의 확정은 곧 성경이라는 세계에 단단한 ‘표지’를 씌운 것과 같습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진리를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가, 역설적으로 성경을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하게 묶인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내 삶의 파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는 지혜

흩어진 문서들이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듯, 우리의 흩어진 일상도 하나의 의미 있는 서사로 통합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1. ‘코덱스’의 효율성으로 인생을 제본하십시오

낱장으로 흩어진 경험은 금세 사라지지만, 기록되어 묶인 경험은 ‘자산’이 됩니다. 여러분의 성공과 실패, 사소한 깨달음들을 파편으로 두지 말고 하나의 일기장이나 노트에 묶어보십시오. 물리적으로 한곳에 모으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한 권의 책’이라는 관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2. 인생의 ‘단수형(The Life)’ 목표를 설정하십시오

우리는 때로 ‘타 비블리아(복수의 책들)’처럼 너무 많은 역할과 목표 속에 분열되곤 합니다. 성경이 단수형 ‘Bible’로 통합되었듯, 수많은 나의 활동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하십시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분열된 일상은 하나의 명확한 방향성을 가진 ‘걸작’으로 거듭납니다.

3. 일관된 ‘낭독’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성경이 예배를 통해 하나의 서사가 되었듯, 여러분의 삶도 주기적으로 ‘복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매주 혹은 매달 자신의 기록을 소리 내어 읽으며 되짚어 보십시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견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닌, 정교하게 쓰여진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 Harry Y. Gamble, Books and Readers in the Early Church: A History of Early Christian Texts (Yale University Press, 1995).

    •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의 기술적 전이가 기독교 정체성과 성경 인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사회사적 명저입니다.

  • Roger Chartier, The Order of Book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 책의 형태(Format)가 독자의 인식과 지식의 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다룬 문헌학적 연구입니다.

  • Bruce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 ‘타 비블리아’라는 복수형 명칭이 단수형 ‘비블리아’로 변화하며 성경의 통일성이 확립된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고증합니다.

  • Colin H. Roberts & T. C. Skeat, The Birth of the Codex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 초기 기독교가 왜 유독 코덱스 형태를 고집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승에 어떤 결정적 역할을 했는지 다룬 기술사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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