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배신이 아니라 다리였습니다: 70인역이 연 ‘보편의 길’
낡은 지도를 새 지도로 옮겨 그리는 일
우리가 사랑하는 어느 낡고 오래된 마을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곳에는 그 마을 사람들만 아는 골목길의 이름이 있고, 그들만 공유하는 정겨운 사투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을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마을 지도를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두 가지 마음에 휩싸입니다. 한쪽에서는 “우리만의 고유한 정취와 뉘앙스가 다른 나라 말로 옮겨지는 순간 사라져 버릴 거야”라며 걱정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 마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겠군!”이라며 기뻐합니다. 이것은 ‘확장’에 대한 설렘입니다.
성경의 역사에서도 이와 똑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히브리어로만 전해지던 ‘품 안의 성소’가,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70인역(LXX)’이라 부릅니다. 이 번역은 과연 고유한 진리를 훼손한 배신이었을까요, 아니면 온 인류를 위한 축복이었을까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문명의 대전이
1. 번역의 배경: 고향의 언어를 잊어버린 이민자들
시리즈 4편과 5편에서 보았듯, 바빌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세계 지식의 용광로였으며, 그곳의 유대인들은 점차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고 헬라어를 일상어로 쓰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히브리어 성경은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봉인된 보물’이었습니다. 조상의 지혜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녀들에게 전수할 방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70인역은 이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전할 것인가?”라는 절박한 생존의 필요에서 시작된, 문명사적인 결단이었습니다.
2. 72인과 70의 미스터리: 왜 숫자가 다른가?
번역에 참여한 사람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발된 총 72명의 장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름은 '72인역'이 아닌 '70인역(Septuaginta, 라틴어로 70)'일까요?
이는 고대인들이 가졌던 '상징적 숫자'의 의미 때문입니다. 유대 전통에서 '70'은 전체와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세상의 모든 민족의 숫자가 70이며,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을 이끌던 장로들의 숫자도 70명이었습니다.
즉, 72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70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로 고쳐 부름으로써, 이 번역본이 온 세상 모든 민족(70민족)을 위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학적 선언을 담은 것입니다. 이름 자체가 이미 이 책의 '보편적 권위'를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3. 전설인가 기적인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의 실체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아리스테아스의 서신(Letter of Aristeas)>은 72명의 번역자가 각기 다른 방에서 번역했음에도 그 결과가 완벽히 일치했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이 '설화'는 사실 강력한 '변론적 장치'입니다.
당시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성경을 극도로 거부했습니다. 번역은 곧 오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70인역 옹호자들은 "72명이 각기 다른 곳에서 작업했음에도 결과가 같았다는 것은, 이 번역 과정에 원저자인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라고 맞섰습니다.
즉, 이 이야기는 "이 헬라어 번역본은 히브리어 원본과 똑같은 신성한 권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신학적 보증서'였던 것입니다.
4. 번역의 고통: 이미지의 언어를 논리의 언어로 옮기는 마찰
번역은 결코 매끄러운 평원이 아니었습니다. 5편에서 설명했듯, 히브리어는 동사 중심의 역동적 언어이고 헬라어는 명사 중심의 정교한 논리 언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할 때의 그 구체적인 생동감을 헬라어의 추상적 개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많은 '의미의 마찰'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의 깊은 '자비(Hesed)'를 헬라어 '엘레오스(Eleos)'로 옮길 때, 어떤 미묘한 감정적 결은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법적·논리적 정의가 그 자리를 채우기도 했습니다. 보수적 학자들이 "번역하는 날은 금송아지를 만든 날만큼 비극적이다"라고 탄식한 이유는, 언어의 틀이 바뀌며 진리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훼손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5. 문명사적 축복: 세계로 나가는 고속도로의 개통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마찰은 온 인류를 향한 거대한 축복이 되었습니다. 70인역을 통해 유대교의 독특한 일신교 사상과 인간 존엄의 윤리가 지중해 전역의 지식인들에게 ‘이해 가능한 언어’로 전파되었습니다.
무엇보다 70인역은 훗날 초기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가장 강력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와 유럽을 누비며 인용했던 성경은 대부분 히브리어 두루마리가 아니라, 누구나 읽고 검증할 수 있었던 헬라어 번역본, 즉 70인역이었습니다.
번역이라는 '필요한 배신'이 있었기에, 성경은 유대 땅의 폐쇄적인 고서를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고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내 가치를 ‘타인의 언어’로 번역하는 법
70인역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통’과 ‘확장’에 관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1. ‘나만의 언어’에 갇히지 마십시오 (Bridge-Building)
여러분이 가진 소중한 가치나 전문 지식이 있다면, 그것을 나만 아는 어려운 용어로 꽁꽁 싸매두지 마십시오. 70인역이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옮겼듯, 여러분의 가치를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로 번역하려 노력하십시오. 진정한 권위는 폐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세계로 건너가 공감을 얻을 때 완성됩니다.
2. 번역 과정의 ‘마찰’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mbrace the Friction)
내 생각이 타인에게 전달될 때 본래의 의도가 100%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오해가 생기고 뉘앙스가 왜곡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확장을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입니다.
완벽한 보존을 위해 침묵하기보다, 불완전하더라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번역하며 나를 세상에 노출하십시오. 그 마찰 속에서 지혜는 더 단단해집니다.
3. 시대의 ‘공용어’를 학습하십시오
70인역이 당시의 표준이었던 헬라어를 선택했듯, 여러분도 이 시대가 소통하는 방식(디지털 문해력, 공감의 언어, 데이터의 논리 등)을 익히십시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그릇은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70인역은 낡은 지도를 새 지도로 옮겨 그린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옛 마을의 사투리는 조금 희미해졌을지 모르나, 그 덕분에 전 세계 사람이 그 마을로 찾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여러분의 삶 또한 고립된 섬이 아닌, 세상을 향해 열린 다리가 되기를 권합니다.
참고 문헌 및 더 깊이 읽기
지혜의 도슨트 '기다리는 폴'이 글의 뼈대로 삼은 학술적 근거들입니다.
Karen H. Jobes & Moisés Silva, Invitation to the Septuagint (Baker Academic, 2015).
70인역의 역사적 배경, 전설의 진위, 그리고 텍스트적 특징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현대의 표준적 입문서입니다.
Tessa Rajak, Translation and Survival: The Greek Bible of the Ancient Jewish Diaspora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번역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정체성 유지와 문화적 생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회사적으로 분석한 자료입니다.
Aristeas' Letter (아리스테아스의 서신): 72명의 서기관 전설의 기원이 되는 고대 문헌으로, 번역의 권위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1차 사료입니다.
Jennifer Mary Dines, The Septuagint (T&T Clark, 2004).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번역본 사이의 언어적 차이와 그로 인한 신학적 변천 과정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manuel Tov, The Text-Critical Use of the Septuagint in Biblical Research (Jerusalem Biblical Studies, 1997).
70인역이 성경 텍스트 비평에서 갖는 독보적인 가치와 원문 복원 과정에서의 중요성을 고증한 학술 자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