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시온주의 vs 대체신학 – 이스라엘과 교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현대 기독교 종말론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이스라엘에 대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어떤 역할을 갖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과는 별개의 하나님의 구속계획 속에 있는 또 다른 대상일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교리적 논쟁을 넘어, 오늘날의 선교, 국제 정치, 특히 중동 문제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민감한 주제입니다. 그 중심에는 크게 두 흐름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기독교 시온주의(Christian Zionism)이고, 다른 하나는 대체신학(Replacement Theology 또는 Supersessionism)입니다.
기독교 시온주의 – 민족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언 성취이다
기독교 시온주의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언약이 민족 이스라엘에 대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특히 세대주의 종말론과 연결되어 있는 이 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재건이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의 예언 성취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 사건'으로 간주되었으며, 1967년 6일 전쟁에서의 예루살렘 탈환은 ‘예언의 두 번째 큰 파동’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산 논쟁, 팔레스타인 분쟁, 아브라함 협정(2020년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간 외교 정상화)과 같은 사건들을 성경 예언과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세계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인식을 강화해 왔습니다.
또한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사건은 시온주의자들에게 ‘현대 정치가 예언 성취에 협력하는 사례’로 여겨졌습니다. 이 결정은 미국 내 기독교 우파의 오랜 로비와 요구에 힘입은 것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하나님 편에 선 외교”로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창세기 12장3절의 말씀—“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을 오늘날 국가 이스라엘에도 적용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정치적, 재정적 지지와 더불어, ‘이스라엘 국기를 교회에서 함께 흔드는 일’, ‘이스라엘 기업 제품을 구매하는 운동’ 등 신앙과 정치, 경제가 복잡하게 얽힌 실천들이 등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단지 신학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절대적 지지와 ‘친이스라엘 외교정책’에 대한 정치적 로비로도 연결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Christians United for Israel(CUFI)'과 같은 로비 단체가 활발히 활동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외교적 지원을 우선시하는 입장을 정당 정치에 강하게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열렬한 시온주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미국 내에서는 여전히 반유대주의 정서도 공존합니다. 2017년 샬러츠빌(Charlottesville)에서의 백인우월주의자 집회에서는 “유대인은 이 땅에서 나가라(Jews will not replace us)”는 구호가 등장했고, 이는 트럼프의 우호층 내부에도 시온주의와 반유대주의가 기이하게 동시에 존재하는 복잡한 양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크리스천 시온주의’라는 말은 바로 이처럼 종말론, 신학, 정치, 정체성, 심지어 미국 보수주의와의 이념적 연계까지 복잡하게 얽힌 입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체신학 –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반면, 대체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계승하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계획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확장되었으며,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된 공동체인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다는 관점입니다.
대체신학은 로마서 9~11장과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초청하신다는 복음의 확장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민족적 이스라엘보다, 믿음 안에서의 이스라엘(갈라디아서 6:16)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성경적인 일관성과 구속사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반면, 실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예민하고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향해 '새로운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에 신성모독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자기 민족의 정체성과 언약의 뿌리를 훔쳐간다는 식의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복음화된 국가들의 교회들이 이스라엘과 아무런 민족적·문화적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라고 주장할 때, 이는 유대인들의 눈에는 역사와 언약에 대한 가벼운 오용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한편 기독교 내부에서도, 유대인을 향해 복음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원이 없다고 단정하거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이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기독교 내부의 반유대주의적 정서와 대체신학이 미묘하게 얽혀 있는 문제로도 지적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조차 동시에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며 시온주의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애정과 경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적인 정서는, 단지 신학적 이해뿐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적 층위가 겹쳐 있는 논쟁의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신학은 교회가 단지 구약의 ‘대체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에서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약속의 계승자로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이 유대인들과의 대화나 신학적 관계에서 일방적인 승계 선언처럼 비춰질 수 있는 만큼, 현대 신학자들은 보다 조심스럽고 겸손한 대화 방식으로 대체신학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더 이상 민족 중심이 아닌, 믿음 중심, 복음 중심의 공동체로 정체성을 갖되,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배제나 대결 구도가 아닌, 신비로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의 동역자적 정체성으로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 어떻게 볼 것인가?
기독교 시온주의와 대체신학은 종말론에 대한 시각뿐 아니라, 교회와 세계, 선교와 정치, 성경 해석의 틀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시온주의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종말 시계의 해석을 선호하며, 성경에 언급된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성취될 것으로 믿습니다. 반면, 대체신학은 이러한 민족적 개념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흐름에 주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 교회를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정답’일까요? 사실 이 질문은 단순한 흑백 논리나 편 가르기로는 해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는 신학뿐 아니라 역사, 문화, 정치, 심지어 국제 외교의 관점까지 포괄하는 복합적인 해석의 틀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시온주의적 시각은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군사적 지지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접근이 자칫 팔레스타인 문제나 중동 갈등의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게 하는 위험도 있습니다. 반대로, 대체신학적 시각은 교회 중심의 구속사를 강조하는 반면, 유대인 공동체의 고유한 정체성과 역사적 상처를 도외시하는 비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두 관점을 절충한 형태의 ‘연속성 신학’ 또는 ‘포괄적 언약 신학’ 등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이 구원으로 부름받았다는 교회의 보편성도 함께 붙잡으려 합니다.
대표적으로 '두 언약론(Dual Covenant Theology)'이나 '하나님의 양손 신학(God's Two Hands)'처럼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교회와 이스라엘을 병렬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모델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더 이상 대립의 구도로 이 문제를 접근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각 민족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어떻게 복음의 완성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함께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지 이론적 화해를 넘어서, 실제 선교 전략, 유대인과의 대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 등 복음과 정의, 평화와 진리의 균형을 이루는 신학적 성숙을 요구하는 지점입니다.
구속사의 중심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다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단지 한 나라에 대한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와 연결된 신학적 질문입니다. 민족 이스라엘이든 교회이든, 그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궁극적 목적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큰 그림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겸손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종말 신앙이 삶과 사회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다음 주제, 재건주의와 신정주의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단지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회 제도와 정치 체계 안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이 운동은, 복음주의 보수 진영과 율법적 실천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드러냈을까요? 종말 신앙이 가져오는 적극적인 사회 개입의 방식과 그 가능성, 그리고 한계까지도 함께 성찰해보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