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에서 배우는 하나님 나라의 기다림과 실천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깊은 의미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속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구절은 단순한 문장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마라나타'의 의미를 묵상했던 우리에게, 이 고백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또 다른 표현이자, 삶의 태도에 대한 도전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외쳤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거대한 종말의 선언이라면, 주기도문 속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그 종말의 소망을 일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기도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다시 주기도문을 깊이 묵상하는 이유는, 바쁘고 소란스러운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눈앞의 성공과 효율만을 좇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그런 우리에게 다시금 방향을 잡아주는 고백입니다.
회사에서 정직하게 일하면서도 주변의 편법과 타협하지 않는 것, 이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살아내는 모습입니다. 또 하나, 가족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작은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구체적인 현장입니다.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정치적 체계나 지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 곧 그분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 가정, 공동체, 그리고 세상 가운데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기다림은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능동적 사명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내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기다림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나라의 가치를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내는 적극적인 실천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제국의 억압과 박해 속에서도 “주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를 기도하며, 정의와 사랑,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었습니다.
2세기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법령으로 인해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상업활동을 제한당하고,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압박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노예와 여성을 동등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3세기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도 병든 자들을 돌보며, 사랑과 자비를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웃을 섬기며,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고백을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이런 모습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 가운데 드러나는 능동적 행동이었습니다.
기다림은 행동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참된 기다림입니다. 작은 친절, 정의로운 선택, 정직한 삶, 이웃을 향한 섬김. 이러한 일상의 행위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명입니다.
주기도문과 요한계시록의 연결
요한계시록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선포하는 책입니다. 21장에서는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라고 선언하며,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보여줍니다. 이는 주기도문에서 고백한 “나라가 임하시오며”가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주기도문과 요한계시록은 서로 다른 시기와 맥락에서 기록되었지만, 동일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일상의 기도 속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신앙인의 고백이라면, 요한계시록은 그 고백이 완성되는 종말적 비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Already), 요한계시록은 그 나라가 완성되어가는 과정(Not Yet)을 선포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벌써(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억압 속에서도, 그들은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며, 요한계시록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은 상업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 한복판에서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했습니다. 또, 카타콤에 모여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의 모습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주기도문과 요한계시록은 단절된 두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앙인의 고백과 그 소망이 완성되는 비전이라는 점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두 고백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나라가 임하옵소서'를 외치며,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것, 이것이 참된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오늘을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단지 기도의 한 구절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의 방향성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는 적극적인 사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빠른 성과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비효율로 여겨지고, 하나님 나라라는 말조차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세상의 흐름과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거창한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오늘 하루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작은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자리입니다.
혹시 우리는 이 기도를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나의 말과 행동, 선택 속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고백은 어떻게 살아나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나요?
나의 일상 속 작은 선택들이, 과연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나요?
주님이 오시는 그날,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나요?
오늘도 우리의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