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나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의 깊은 의미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 하나는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의 정점에 있는 말씀이 바로 "마라나타"입니다. 이 단어는 아람어로 '주님이 오신다' 혹은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지니며,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예배와 기도 중 자주 사용하던 고백이었습니다.

어원적으로 마라나타는 아람어 '마란(우리 주님)'과 '아타(오시옵소서)'의 합성어입니다.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아람어 원형 그대로 음역되어 'Μαραναθα'로 표기됩니다. 이는 당시 다국어 환경에서 살아가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원초적이고 강렬한 신앙 고백으로 작용했습니다. 

라틴어로는 'Maranatha'로 전해졌으며, 이후 중세 기독교 전통 속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로 남았습니다. 현대 영어권에서도 이 단어는 종말론적 신앙을 상징하는 용어로 간혹 사용되며, 'Come, Lord Jesus'라는 표현으로 풀이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라고 외치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서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이 고백은 단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소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네로 황제의 기독교 탄압(서기 64년경 로마 대화재 이후),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의 국교 부정과 박해(서기 81-96년), 지역마다 가해지던 경제적 제재와 배교 강요 등 초대 성도들의 삶은 위협으로 가득했습니다. 

검투장에 내몰린 순교자들, 경제적 고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무명의 성도들, 지하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리며 '마라나타'를 외치던 그들의 고백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재림은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었고, 소망이었으며,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닻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외쳤던 마라나타, 그 깊은 의미와 오늘날 우리가 살아내야 할 재림 신앙을 함께 묵상해보는 '깨어 기다리는 삶' 블로그 글의 썸네일 이미지 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과 고린도전서 16:22: 기다림의 두 목소리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은 밧모섬 유배 중에도, 교회들이 겪는 박해와 환란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한편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바울도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라고 고백합니다. 바울 역시 복음 전파의 여정 중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며, 그 소망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나누었습니다.

요한과 바울, 두 사도 모두 '마라나타'를 외쳤습니다. 그들의 삶과 사역은 재림의 소망 위에 세워졌고, 그 고백은 단지 먼 미래의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고 살아내는 믿음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오늘날 마라나타는 왜 희미해졌는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마라나타"는 여전히 살아있는 고백일까요? 솔직히 말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재림은 점점 먼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2천 년 동안 오지 않은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때때로 허망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즉각적인 결과를 요구합니다. 기다림은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서도 재림에 대한 설교는 줄어들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주제들이 더 많이 다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믿음, 밧모섬의 요한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재림 신앙은 단지 신학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작은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박해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매일같이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의 고난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 역시 외로운 섬에서 하늘의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다. 밧모섬은 소아시아 해안에서 약 60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로마 제국은 정치적, 종교적 소요를 일으킨 인물들을 이곳으로 유배시키곤 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죄로 유배되었습니다. 요한은 에베소 교회를 돌보며 활발한 사역을 펼쳤지만,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로마의 정책과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밧모섬으로 추방당한 것입니다.

밧모섬에서 요한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외로운 유배지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기록하며 요한계시록을 집필했습니다. 그가 목격한 하늘의 비전,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어린 양의 승리는 단지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박해받는 교회들을 위한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빛나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고난과 억압 속에서도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그 날을 확신하며,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간절히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라나타적 삶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라나타는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작은 나눔, 직장에서의 정직한 태도, SNS 속에서도 진실을 말하는 용기, 매일 아침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이런 일상 속 작은 실천들이 바로 오늘날의 마라나타적 삶입니다.

특히 물질주의와 성공지향적 가치가 넘치는 시대에,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쫓지만, 마라나타를 고백하는 성도는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마라나타를 살아내는 세 가지 실천

  1. 말씀 속에서 주님의 약속을 붙들기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재림의 소망을 마음에 새깁니다.

  2.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기 작은 섬김과 나눔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웁니다.

  3.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선택하기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는 믿음을 지킵니다.


묵상을 위한 깊은 질문

  • 나는 오늘 나의 일상 속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주님의 나라를 준비할 수 있을까요?

  • 내가 마주하는 유혹과 유익 앞에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고백할 수 있는 작은 선택은 무엇인가요?

  • 나의 가정과 직장, 공동체 속에서 마라나타를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기다림의 고백, 삶의 태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마라나타를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그 고백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다림은 결코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능동적이고, 깨어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마라나타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도 함께 고백해봅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기다리는 폴(Paul of Await) 드림 🥰 

함께 보면 좋은 인기 글

하나님이 창조한 천사들의 타락: 루시엘과 천사들의 반란

천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

천사의 계급과 역할: 신비로운 영적 존재들의 비밀을 탐구하다